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군인 황제 시대 (문단 편집) == 해당 시기의 로마 황제 == 3세기 가운데 235~284년 집권한 황제들의 대체적 연표와 중요한 이정표적 업적을 나열한다. 악행이나 실수는 워낙 다루는 곳이 많아서, 해당 황제의 목록에서 상세히 기술한다. 소위 말하는 '군인 황제'들을 살펴보면 생각보다 역량이 뛰어난 인물도 많고, “난세만 아니었다면...”라고 부를 정도로 불운한 황제들이 생각보다 많다. 즉, 이미지와 달리 중대한 결격 사유가 있었던 자는 적다. 다만 더 강력한 경쟁자가 있거나 예상하지 못한 돌발상황 등의 일이 터진 경우가 많아서,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제거당한 경우가 꽤 많다. 이는 그전 시기와 그 후 시기를 살펴봐도 드문 일이며, 제위 계승 시스템이 극도로 불안정하지만 반면 나태하거나 현실안주형 군주는 오래 못 가는 로마 특유의 황제 계승 시스템의 장단점이 극도로 표출된 시기인 게 원인이다. 그리고 정말 이들이 군인 황제였는지도 의문시 되고 있다. 사실 소위 군인 황제라고 칭해야 하는 기간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암살되고 즉위한 대대장 출신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시대와 갈리에누스 사후 일리리쿰 출신들이 연달아 황제가 되는 시기 외에는 많지 않다. 이 시기 동안 제위를 차지한 이들을 보면 많은 황제들이 원로원 계층이었고, 생각 외로 이름난 이탈리아 귀족 가문 출신들도 꽤 보인다.[*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그러나 이 시기를 대표하는 황제들을 보면 알듯이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부터 사두정치 황제까지 일부를 제외하고 죄다 발칸 반도 출신 군인이 많고, 군대의 추대를 받아 즉위한 황제가 대다수라고 해석한다면 ‘군인 황제 시대’라는 것은 말이 된다. 더군다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논외로 치더라도, 타키투스 외에는 로마 황제 중 문민정부의 상징이며 원로원 대표를 뜻하는 프린켑스 직위를 겸임한 로마 황제는 없다. 이는 아우구스투스 이래 로마 제정에서 "로마 황제(임페라토르) = 프린켑스"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또 군대의 추대 혹은 근위대의 지지가 황제의 정통성과 직결되고 있는 흐름을 알게 되면 왜 군인황제시대라고 부르는지 단번에 이해가 된다. 따라서 이 기간 중 원로원이 추대한 황제는 몇 없었고 그들은 군대의 불신임, 원로원의 배신, 내전 등으로 인해 거진 단명했다. 특히 발레리아누스 이후로는 타키투스만이 원로원이 추대한 황제이고 그마저도 패닉에 빠진 군대가 원로원에게 황제 선출을 떠넘겨서 세워졌다. 그리고 이들 군인 황제는 이미지와 달리 제국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쪼개질 뻔한 제국을 구했으며 개혁도 해냈다. * [[막시미누스 트라쿠스]](235~238, 암살) 로마 제국 최초의 순수 군인 출신, 그것도 신병교육대장으로 군의 추대를 통해 제위에 오른 황제다. 간단히 말하면 '''군인 황제 시대의 시작을 연 1번 타자'''. 이름만 보면, 트라키아 지방을 정복한 군인 황제 같지만 트라키아 태생이라서 트라쿠스라고 불린 황제다. 현역 군인으로 있던 시절에 활약했던 게르마니아 일대에서 3년 동안 라인강 유역의 게르만족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성과를 냈지만, 원로원과의 관계도 최악인 데다 서민들에게도 지나친 세금 인상과 물자차출로 인기가 없었다. * [[고르디아누스 1세]](자살), [[고르디아누스 2세]](전사), [[푸피에누스]](암살), [[발비누스]](암살, 이상 '''[[여섯 황제의 해|모두 238년 한 해에 재위]]''') 3세기의 위기 중 첫 번째 위기라고 불리는 시대의 황제들. 이중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는 당대 사가 헤로디아누스와 현대 사가들에게 개인적 야망으로 내전을 심화시킨 무책임한 이들로 평가받고 있다. 원로원이나 지역 주민들이 세금을 마구잡이로 뜯어가는 막시미누스에 대항하기 위해 세워진 황제들로, 모두 원로원 의원이었다. [[카르타고]]에서 북아프리카 주민들에게 옹립된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전승 기록과 달리 오현제와 전혀 혈연관계가 없는 터키 지역 태생의 신참자 출신이다. 반면, 이탈리아 로마에서 원로원에게 공동황제로 옹립된 푸피에누스[* 고대전승에 따르면 대장장이 아들이었으나 귀부인의 양자가 된 케이스라고 하는데, 20세기 이후 유물, 유적 등을 통해 이탈리아 세습귀족임이 밝혀졌다.]와 발비누스는 모두 원로원 계층의 세습 이탈리아 귀족 출신이다. * [[고르디아누스 3세]](238~244, 암살 또는 전사[* 전승된 이야기에서는 암살됐다고 하지만, 교전국 페르시아 측의 기록에 따르면 전투 중 전사했다고 한다.]) 고르디아누스 1세의 외손자, 고르디아누스 2세의 조카로 종종 비공식적 왕조 중 하나인 고르디아누스 왕조로 묶여 서술되기도 한다.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가 공동황제로 옹립될 당시, 로마 민중들의 추대로 카이사르 칭호를 얻었고 두 황제가 병사들에게 로마 시내에서 잔인하게 살해된 뒤 단독황제가 됐다. 그러나 페르시아와의 전쟁 중 근위대장이던 장인이 갑자기 죽은 뒤 멘붕 상태에서 교전 중 암살(또는 전사)됐다. * [[필리푸스 아라부스]](244~249, 자살) 로마제국 천년제를 주최한 것으로 유명한 황제. 별칭처럼 아라비아 태생의 베두인족 출신이다. 고르디아누스 3세의 근위대장 출신으로 소년 황제를 암살한 배후로 알려져 있다. 필리푸스 아라부스가 기독교도였기 때문에 후임자 데키우스가 조직적으로 기독교 박해를 했다는 고대 전승 기록이 있다. * [[데키우스]](249~251, 전사) 3세기부터 등장한 발칸 반도 태생의 로마 황제 1번 타자. 로마 황제 중 기독교를 조직적으로 박해한 최초의 황제인 탓에 4세기 이후 평가가 현재까지도 극과 극으로 갈린다. 발칸반도로 침입한 [[고트족]]을 막다가 공동황제였던 장남과 함께 출전했다가 최초로 전사한 로마황제다. *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251~253, 암살), [[아이밀리아누스]](253, 암살) 데키우스 전사 후 연이어 즉위한 황제들로 이 시대의 전형적인 혼란기를 잘 보여주는 시기 제위에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원로원 의석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전자는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에트루리아계 로마귀족이었고 후자는 말 북아프리카 속주의 섬에서 태어난 토착민족 태생에 미천한 가문으로 태어나 자신의 능력 하나로 황제까지 된 사람이다. 갈루스는 자신이 지지하던 데키우스 전사 후 옹립됐는데 고트족과의 협상에서 연공금을 비롯해 로마인 포로를 내주는 등 각종 굴욕협상을 했고, 귀국 후 전염병이 터진 탓에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만 신경쓰게 된 까닭에 욕을 많이 먹었다. 따라서 데키우스 부자가 전사한 위기상황 속에서 노력했지만 인기가 없었다. 그러다가 군을 재정비해 반격 후 승리를 거둔 아이밀리아누스가 병사들의 추대로 즉위해 갈루스와 내전을 벌였고 결국 패전 후 암살당했다. 하지만 승리한 그 역시 석 달 만에 갈루스의 동료이자 지지자인 발레리아누스 부자가 군의 추대로 즉위해 이탈리아로 들어오면서 다시 내전이 벌어졌고 아이밀리아누스 역시 갈루스처럼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 [[발레리아누스]](253~260, 포로로 옥사), [[갈리에누스]](253~268, 암살) [[3세기의 위기]] 중 가장 큰 위기. 두 사람은 부자 관계로 갈루스처럼 공화정 이래 에트루리아계 [[노빌레스]]를 대표한 명문귀족이었고, 그 가문은 크라수스를 배출한 리키니우스 가문이었다. 발레리아누스는 그 능력만 보면 훌륭했지만 동쪽, 서쪽에서 계속 밀려오는 외적의 공격 탓에 장남 갈리에누스와 협동황제라는 개념을 만들어 7년 내내 동방으로 건너가 거의 전쟁만 치뤘다. 그러다가 그는 [[에데사 전투]] 중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사푸르 1세에게 붙잡혀 최초로 포로가 된 로마 황제가 됐다. 아울러 갈리에누스 역시 아버지가 포로가 된 이후 서방과 동방에서 밀려오는 외적들 탓에 욕은 욕대로 먹고 고생은 고생대로 했다. 이들 부자 시대 때 로마 제국은 사실상 [[팔미라 제국]], [[갈리아 제국]]으로 3분할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로마군의 대대적인 전술 교리 개편이 바로 이들 부자에 의해 이뤄졌으며, 이 시기 때 성장한 일리리아계 장교 집단들은 갈리에누스 형제 암살 뒤 연이어 3세기 군인 황제들로 즉위했다. *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268~270, 병사) 클라우디우스 2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카라칼라]] 황제의 안토니누스 칙령 후 로마시민권자가 된 집안 출신으로 일리리아계 장교집단 중 첫 번째로 즉위했고, 갈리에누스 암살 후 벌어진 혼란을 막는 데 주력해 야만족을 크게 격파하고 어느 정도 로마 제국의 교통정리를 했다. 여담으로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 작성된 믿을 수 없는 책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어머니가 이 황제의 조카라고 한다. * [[아우렐리아누스]](270~275, 암살) 순수 군인 황제 중 평이 좋은 일리리아 삼총사 황제 중 한 명.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완성한 도미나투스(전제정)를 법제화한 뒤 과감히 시행하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각종 개혁의 청사진을 제공한 황제다. 갈리에누스 시대에 배출된 일리리쿰 태생 초엘리트 장교 집단 멤버 중 한 명으로, 군사적 재능은 역대 로마 황제 중 가장 천재적인 황제로 평가된다. 즉위 후 특유의 성실하고 엄격한 성품으로 제국의 기강을 잡고 로마시의 성벽 건설. 삼분된 제국을 재통일하고 무너져가던 제국 방비선을 재구축하여 3세기의 위기를 어느 정도는 잠재웠다고 평가받고 있다. 허나 성격이 [[티베리우스]]처럼 본인과 타인 모두에게 엄격해 개인 비서가 비리를 저지른 뒤 이를 감추기 위한 개인적 이유로 어이없게 암살됐다. 아우렐리아누스가 암살된 이후 수개월 동안 차기 로마 황제가 결정되지 않았다. * [[타키투스(황제)|타키투스]](275~276, 병사) 238년 이후 원로원 의원들이 번갈아 맡고 있던 프린켑스 세나투스 직을 맡고 있는 점, 원로원 의원 중 최고령 현직 의원이라는 점 때문에 제위에 올랐다.아우렐리아누스 암살 후 황제로 지명되었을 때 나이가 일흔 다섯이었고, 젊을 적에는 발레리아누스 황제 밑에서 총독, 장군을 지내는 등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다. 취임 당시 개인 재산을 전부 처분하여 국고에 돌리고, 목욕탕을 짓는 등 할 수 있는 일은 했다고 하며, 군부에서 신망을 두루 받고 있던 프로부스 쪽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허나 나이가 너무 많아 페르시아 전선으로 이동 중 병사했다. 역사가 타키투스와는 같은 씨족명을 쓰고 있긴 하지만, 후손일 가능성은 낮다. 이와 별개로 타키투스의 저작을 널리 퍼뜨려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게 하긴 했다. * [[프로부스]](276~282, 암살) 갈리에누스 시대에 등장한 일리리아 출신의 세 황제 중 마지막 황제. 군사, 정치, 행정 등의 업무를 잘 수행했고, 군인 출신 황제 중 생전과 사후 모두 로마 모든 계층 사람들에게 평이 굉장히 좋은 황제 중 한 명이다. 따라서 순수 군인 출신임에도 '''프린키파투스 체제의 마지막 임페라토르이자 프린켑스'''로 평가받고 있고, 당대 원로원과 민중들에게도 큰 존경을 받았다. 즉위 직후 갈리아 중앙까지 유린하던 게르만족을 모두 물리치고 트라키아 일대를 공격한 야만족까지 제압한 뒤, 포로들과 항복한 게르만족, 퇴역병사들을 제국 각지 도시, 농촌 재건을 위해 정착시켜 성공했다. 하지만 이미 전투에만 익숙한 병력들에게 토목공사와 농사를 가르쳐서 농민화를 추진하려던 계획이 현역 병력들에게 지지를 못 얻은 탓에 휘하 병사들의 폭동으로 어이없게 암살됐다. * [[카루스]](282~283, 사고사) 원로원 의원으로 프로부스의 근위대장을 맡던 중 황제가 폭동으로 암살되자 옹립된 황제. 엄격하고 절제된 성품으로 유명해, 282년 벌어진 프로부스 암살과 군대 폭동을 단번에 제압하고, 이전 황제들과 달리 전임자 신원복구 및 유가족 안전보장을 지시해 위기에 빠질 제국을 안정시켰다. 즉위와 동시에 프로부스가 수행 중인 페르시아 원정을 이어받아,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큰 타격을 주어 동부 국경에서의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카루스는 숙영텐트에 [[번개]]가 떨어져 사망했다. 여담으로 카루스는 [[대머리]]였는데, 페르시아 측에게 자신의 머리숱을 소재로 교섭을 위해 온 사절단에게 무섭게 경고한 일화가 유명하다. * [[카리누스]](283~285, 암살), [[누메리아누스]](283~284, 암살) 아버지 카루스와 같이 참전한 누메리아누스는 마차 안에서 살해된 채 근위대장 디오클레스(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발견됐다. 카리누스는 카루스의 아들이자 누메리아누스의 형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의 내전에서 패한 이유와 무절제한 사생활 탓에 군인황제 시기 황제 중 평이 안 좋은, 가장 악명 높은 황제로 기록되어 있다. 기독교 세례를 받은 기독교도였다는 이야기가 있는 황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패배한 뒤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탓에 정확히 알 수 없다. *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로 이어짐. 위의 인물들은 로마 공화정의 인정을 받거나 그에 준한 주요 황제들이며, 이들 외에도 황제로 참칭한 인물들은 더 많다. 예를 들면 [[스폰시아누스]]를 들 수 있다. 당대 로마의 문서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https://www.youtube.com/watch?v=8B0s4lyAqDY|그의 얼굴과 이름이 찍혀진 주화가 실제 3세기에 유통되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이 주화가 발견된 위치가 [[트란실바니아]]라는 점에서, 그는 아마도 당시 [[다키아]], 즉 다뉴브 강 하류에 배치되었던 로마 군단으로부터 황제로 추대받은 현지 사령관일 가능성이 높다. 유사한 인물들로는 [[잉게누우스]], [[실반나쿠스]], [[레갈리아누스]] 등이 있으며, 현재에는 대부분 고대 동전으로만 존재를 추정할 수 있을 따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